침묵 없는 지구의 존재들에게
“지구에 침묵은 없네.”
유난히도 더운 여름이었다. 뉴스에서는 연일 폭염과 극단기후, 기후위기에 대해 보도했고, 밖을 나서기만 하면 솟구치는 땀방울이 이를 증명했다. 마스크를 뒤집어쓴 것도 큰 몫을 했다. 하지만 말복과 처서가 지나면서 놀랍게도 더위는 잠잠해졌다. 습기를 조금 머금은 시원한 바람이 여름 밤을 식혀주었다. 에밀리 디킨슨(Emily Dickinson)은 지구에 침묵이 없다고 말했다. 이 구절은 언뜻 “지구는 참지 않지!”라고 이해될 수 있다. 이 또한 맞다. 마스크를 벗지 못한 채, 최악의 이상고온 여름을 맞이한 인간에게 지구는 무려 전염병과 기후위기의 동시 공격적인 외침을 던질 것일 수 있다.
하지만 디킨슨이 이야기하는 침묵이란 갑자기 소리가 나면 세상을 소스라치게 하는, 침묵의 전과 후를 극명하게 가르는 침묵으로 볼 수도 있다. 이렇게 드라마틱한 침묵이 지구에 없다는 건 지구의 작용에 갑작스럽고, 극명한 변화는 없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. 지구는 늘 그렇듯이 움직이고 있었다. 올 여름 우리가 맞이한 전례 없는 더위도, 홍수나 가뭄도, 심지어 절기에 따른 계절의 전환도, 지구의 체계 안에서는 모두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 일이었다. 그러나 독립적인 흐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 일어난 활동들과 이 활동들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나타나야 하는 일이었다. 이 활동에는 수년간의 인류의 행동을 비롯하여 이 행성에 살아가는 모든 구성원의 활동이 포괄된다. 오늘날의 우리가 마주한 것은 침묵한 채, 정지된 공간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 아니라, 여러 화음과 불협화음이 공존하는 오래된 소리의 공명이다. 이 소리는 청자에 의해 들리든, 들리지 않든 산발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. 그리고 포착되어야 한다는 의무나 간절함 없이 언제까지나 흘러나올 것이다.
그렇기에 우리가 지구의 소리를 눈치채기 시작한 것은 이 소리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다. 이 소리가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침투하는 것을 가까스로 깨달았을 뿐이다. 그러니 이제 이 소리에 귀 기울여볼까 하고 마음먹었을 뿐이다. 지구는 한 번도 침묵한 적이 없었다. 동시에 들어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었다. 고민은 오롯이 소리를 듣기로 결심한 자의 몫이다. 과연 얽히고 설킨 이 소리의 향연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 무엇을 할 것인가?
분명한 것은 고민의 시간에도 지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.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가고, 선선한 가을이 찾아오듯 끊임없이 소리를 내며 움직일 것이다. 이 소리에 적절히 응답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의 오만한 욕심일지 모른다. 다만 이 소리의 소용돌이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그저 우리도 부단히 움직여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. 침묵이 없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지구-존재로서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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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There is no Silence in the Earth — so silent>
by Emily Dickinson
There is no Silence in the Earth — so silent As that endured
Which uttered, would discourage Nature And haunt the World
에밀리 엘리자베스 디킨슨 (Emily Elizabeth Dickinson, 1830년 12월 10일 - 1886년 5월 15일)은 미국의 시인이다. 미국 매사추세츠(Massachusetts)주의 앰허스트(Amherst)에서 태어났다.
디킨슨은 거의 2000편에 달하는 시를 썼는데 주로 사랑, 죽음, 이별, 영혼, 천국 등을 소재로 한 명상시가 대부분이다. 미국에서 가장 천재적인 시인들 중 한 명으로 꼽힌다. (출처: 위키백과)